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툴룬 왕조 (문단 편집) == 아바스 왕조와의 타협 == 884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부강한 이집트를 남긴 채로 죽었고, 차남인 쿠마라와이가 계승했다. 장남 아바스는 882년 반란을 일으킨 후 계승권을 잃었는데, 쿠마라와이에게 충성 서약('바이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집권 이후 암살되었다. 쿠마라와이의 계승은 중세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아바스 칼리파조의 개국 이후, 지방 제후가 처음으로 칼리파의 승인없이 아들에게 정권을 세습한 것이었다.''' 20세에 불과한 젊은 쿠마라와이에 대해 휘하 장군 중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 와시티는 아바스 조와 내통했고, 그 섭정인 알 무와파크는 이븐 쿤다즈와 이븐 아빌 사즈 휘하의 이집트 원정군을 파견했다.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인 안티오크, 알레포, 홈스, 다마스쿠스의 총독들은 손쉽게 항복했다. 쿠마라와이가 파견한 툴룬 군대는 다마스쿠스를 회복했으나 샤이자르 전투에서 아바스군에게 대패하고, 팔레스타인의 라믈라로 패주했다. 이에 라믈라로 친히 북상한 쿠마라와이는 지도부가 분열된 아바스 군대와 라믈라 북쪽 타와힌 평원에서 맞서 싸웠다.(885년 4월 6일) 전투는 아바스군의 우세로 전개되었으나, 승리에 도취된 아바스군이 약탈에 전념하는 틈을 타, 툴룬군 측 장교였던 사드 알 아이사르가 반격에 나서 패배를 승리로 바꾸었다. 다만 이후 사드는 다마스쿠스에서 자립을 시도하다가 사로잡혔고, 쿠마라와이에 의해 친히 처형되었다. 한편 아바스 조와의 지속적인 대결에 자신이 없었던 쿠마라와이는 타와힌 전투의 아바스군 포로들에게 고용과 (몸값이 없는) 안전한 귀환의 선택지를 주었고, 이러한 호의와 함께 협상이 개시된 결과, 휴전이 성사되었다.(886. 12) 쿠마라와이는 [[쿠트바]]에서 섭정 알 무와파크의 이름을 언급하고, 정해지지 않은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30년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후 890년까지 쿠마라와이는 이븐 쿤다즈를 격파하고, [[자지라]] 총독 이븐 아빌 사즈와 [[타르수스]] 총독 야자만 알 카딤의 복속을 받았다. 892년 제16대 칼리파에 오른 [[알 무타디드]](섭정 알 무와파크의 아들)는 이듬해 봄 쿠마라와이의 지배권을 재차 인정했다. 그 대가로 쿠마라와이는 300,000 디나르의 연공을 바치고, 체납금으로써 200,000 디나르를 추가 납부했다. 또한 자지라의 3개 부분 중 디야르라비아와 디야르무다르를 아바스 조에게 양도하고, [[디야르바크르]]의 지배권만을 유지했다.[* 쉽게 말해서 자지라의 이라크 부분만 내어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칼리파의 깃발과 예복을 제작하던 알렉산드리아와 푸스타트의 티라즈 공방 역시 아바스 조의 통제하에 놓였다. 평화협정은 정략결혼으로 매듭지어졌다. 쿠마라와이는 딸 카트르 앗 나다를 칼리파 알 무타디드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했는데, 알 무타디드는 그녀를 아들 대신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당대 역사가들은 이집트에서 이라크로 향하는 신부 행렬의 화려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신부측 지참금은 무려 100만 디나르에 달했고, 이는 중세 아랍 역사상 최대 규모로 당시 이집트의 부강함을 나타냈다. 그러나 쿠마라와이는 자신의 애첩과 간통한 후 처벌을 두려워하던 하인에 의해 암살되었다.(896년 1월 18일) 나름 유능하던 군주가 어린 아들들을 두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툴룬 왕조의 운명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